용서받지 못한 자, 정수근
임의탈퇴. 쉽게 생각해서 일종의 은퇴라고 보면 된다. 구단에서 어떤 소속 선수의 임의탈퇴를 공시하면 그 날로부터 1년 동안 해당 선수는 경기에 뛸 수도 없고 잔여연봉을 받을 수도 없고 다른 팀으로 옮길 수도 없다. 그리고 1년의 임의탈퇴 기간은 구단에서 해제하지 않는한 계속 연장되기 때문에 구단의 동의가 없으면 사실상 국내에서 프로야구 선수의 신분이 끝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은퇴를 가장해 타팀으로 무단 이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처럼 구단에게 강력한 통제권이 주어져 있는 셈이다.
임의탈퇴는 대개 은퇴를 선언한 선수들이나 퇴출된 외국인 선수들이 주를 이룬다. 그 외 특이한 경우가 있다면, SK에서 부상 중인 엄정욱과 이승호를 임의탈퇴 공시한 뒤 이면계약으로 선수 신분을 보장해주는 일종의 편법을 썼던 경우가 있었고, KIA의 김진우나 롯데의 노장진처럼 선수의 태도에 문제가 있을 때 구단에서 징계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유형의 임의탈퇴가 있는데, 두산의 윤승균처럼 범죄에 연루된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SK의 위대한은 데뷔 전 저지른 범죄 때문에 마찬가지로 임의탈퇴 공시되었다).
최근 또 한 명이 임의탈퇴로 사실상 올 시즌부터 내년까지 선수 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그 장본인은 롯데의 정수근. 팀의 주장이며, 팀의 오랜 숙원인 4강 진출을 위해 큰 역할을 하는 선수이다. 그런데 구단에서 시즌 중 갑자기 임의탈퇴 공시라는 강수를 두게 된 이유, 바로 위에 언급한 세 번째 유형에 해당된다. 정수근이 만취 상태에서 경비원을 폭행하고, 지구대에 연행된 뒤에도 경찰관을 폭행해 결국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이다. 폭행의 정도가 심하지 않아 불구속입건을 예상했던 롯데 구단측은, 구속이라는 예상 밖의 결과로 인해 결국 정수근을 임의탈퇴 공시하기로 했다고 한다.
공인(公人)에게는 더 큰 책임감이 주어지기 때문에 사소한 몸가짐 하나도 조심해야 한다고들 한다. 똑 같은 범죄에 대해서도 연예인이나 프로선수 등 공인이 더 큰 징계를 받는 것이 그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공인은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자리이기 때문에 같은 범죄라도 사회에 미치는 파장은 더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공인이기 때문에 일부러 시비를 걸거나 사건의 피해가 부풀려지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일례로, 최근까지도 언론에 종종 보도되는 송일국 기자 폭행사건이나, 얼마 전 꽤 시끄러웠던 최민수 노인 폭행사건 등이 해당된다. 그러니, 이런 경우에 단순 보도 내용만으로 공인을 무조건 비난해서는 안되고, 징계를 내리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수근이 큰 벌을 받게 된 것은 과거의 전과도 한 몫 했다고 한다. 이미 정수근은 두 차례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킨 적이 있고, 한 번은 입건까지 되었다. 또 전임 강병철 감독과의 불화 때문에 팀에 큰 보탬이 되지 못하는 와중에 사생활에 있어서도 좋지 않은 뉴스들이 보도되기도 했었다. 이런 과거에 비추어, 이제 서른을 넘긴 중견 프로선수로서 아직도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는 것은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롯데 구단의 판단인 셈이다. 가뜩이나 중심타선의 부진으로 힘겨운 4강 싸움을 하고 있는 롯데가 남은 기간 동안 “가을야구”의 꿈을 이어가려면 선수단의 단합과 정신무장이 필수인데, 정수근의 행동이 이를 해쳤다고 본 것이고 그래서 중징계를 내렸다는 것이다.
물론 롯데에서 정수근을 징계하지 않더라도 KBO에서 중징계를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팀의 주장이며 주전선수를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임의탈퇴하는 것은 상당한 결단이다.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사건이 더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정수근이 용서받지 못한 것은 결국 그의 태도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 7월 16일 새벽은 다음날 경기가 예정된 평일이었다. 그런데 팀의 주전 선수가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시고 만취 상태로 돌아다녔다는 것은 프로선수로서의 자세라 할 수 없는 노릇이고, 정수근에게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책이다.
정수근은 분명 뛰어난 선수이다. 입단 후 올 해까지 14년 연속으로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했고, 두산 시절 4년 연속 도루왕에 오르기도 했던 것은 아무나 쉽게 넘볼 기록이 아니다. FA 자격을 획득한 뒤 가장 많은 연봉을 제시한 삼성 대신 롯데를 선택했던 것도, 약팀을 끌어올려 야구 발전에 공헌하고 싶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할 정도로 그의 열정은 분명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감독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자 노골적으로 언론에 불평을 털어놓고, 유쾌한 성격만큼 사건사고도 자주 발생하는 것을 보면, 팀보다 자신을 더 생각하는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롯데 팬들은 그의 불성실한 모습과 연관된 “해담(海談)”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냉소하기도 했지만, 변변한 활약을 하지 못하던 선수를 올스타까지 뽑아주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또 롯데와의 6년의 계약 기간 중 4년을 허송세월한 “먹튀”였지만, 올 시즌 다시 그를 열광적으로 응원하며 “분위기파”인 정수근이 전성기 못지 않은 활약을 되살리도록 돕기도 했다. 덕분에 정수근은 올 해 3할에 가까운 타율로 롯데의 테이블세터를 훌륭히 소화하고 있었다. 타율 자체는 2007년과 비슷하지만, 이미 순위가 결정된 후 무의미하게 몰아친 2007년의 타율과 올 해의 타율은 그 영양가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정수근은 다시 한 번 팬들을 저버린 셈이다. 또 한 번 “나”를 우선시하며 중요한 시기에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셈이다. 보도된 내용만으로는, 폭행당한 경비원은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거의 부상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러니 정수근에게도 억울함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억울함이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의 용서받지 못함은 타당하다. 올 해에도 정수근은 올스타 선발이 유력하지만 아마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타팀 팬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정수근에게 표를 던진 롯데 팬들을 향한 꽤 묵직한 배신이라고 한다면 너무한 표현일까?
김주찬의 포텐셜이 좀처럼 터지지 않는 롯데의 입장에서는, 정수근까지 없다면 테이블세터 두 자리를 채우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승화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고, 최근 1군에 올라온 이인구는 여전히 미완성이다. 또 팀 전체도루의 약 1/4이 정수근의 몫이었다는 점에서 생기는 마이너스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데가 형식적인 징계를 택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히 박수를 받을만한 모험이다. 롯데가 징계하지 않아도 KBO의 징계나 구속 등의 사유로 결과가 똑같을 수는 있었겠지만, 아무튼 자기 자식을 제 손으로 쳐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롯데의 4강이 더 힘들어질 것인지, 아니면 팀의 정신 재무장의 기회가 되어 반전의 계기가 될 것인지, 시즌 종반을 향해 가는 4강 싸움에 흥미로운 변수가 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