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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 주인공, 임창용

대부분의 야구선수는 “기승전결”의 드라마를 갖는다. 가진 것은 패기뿐인 열혈 신인이 조금씩 프로선수로 자리를 잡으며 포텐셜을 터뜨리고 전성기를 누리다 부상이나 나이 등의 이유로 선수생활을 마무리한다.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팬들은 포텐셜을 터뜨릴 유망주를 주목하고 전성기를 누리는 스타플레이어에 열광하고 은퇴를 앞둔 베테랑을 존경한다.


하지만 만화를 보면, 이런 드라마와는 무관한 별종 선수들이 종종 튀어나온다. 타자들이 칠 엄두를 내지 못하는 투수, 어떤 공이든 담장 밖으로 넘기는 타자, 나이에 관계없이 그렇게 남들보다 월등한 능력으로 경기를 지배하는 주인공이 어느 순간 부상을 당하더라도 결국에는 다시금 지배자로 돌아오곤 한다. 물론 그들의 경기는 종종 범상치 않은 순간을 선보이기도 한다. 범인(凡人)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현실에서 이런 만화 속 주인공을 찾으라면, 필자는 주저 없이 김병현을 꼽는다. 그리고 국내 프로야구로 범위를 좁힌다면, 누가 뭐라 해도 이상훈과 임창용이 가장 먼저 손꼽힐 것이다. 이상훈은 록가수로 변신해 그야말로 만화 같은 은퇴까지 치른 셈. 아직 현역인 임창용은 당연히 그에 버금갈 은퇴를 하지는 않았지만, 범상치 않은 선수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데뷔하자마자 곧장 포텐셜을 터뜨려 “창용불패”라는 닉네임을 얻었고, 그렇게 리그를 평정하고는 부상으로 사그라지는 듯했다가, 어느새 바다 건너 일본에서 다시금 범상치 않은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사이드암과 쓰리쿼터를 오가는 종잡을 수 없는 투구폼, 게임 속 스페셜 유닛이라도 되는 듯한 157km의 광속구, 그리고 장난기가 넘치는 능글능글한 표정까지. 임창용은 만화 속에 나올법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임창용은 등장부터 만화 같았다. 사이드암 투수는 구속이 느려도 다양한 변화구로 타자를 요리하던 것이 일반적이던 당시, 무명 신인이 던지는 150km에 육박하는 강속구가 뱀처럼 휘어 들어오는 모습에 타자들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만화 속 주인공처럼 그 등장부터가 “타자 위에 군림하는 투수”였던 셈. 1995년에 데뷔한 뒤 두 해만에 팀의 주축 불펜투수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1997년 “포스트 선동열”로 해태의 뒷문을 맡으며 팀 우승을 이끌었다. 주전 마무리 첫해, 그보다 뛰어난 마무리는 LG 이상훈뿐이었고, 1998년에는 구원왕에 오르며 단 4년 만에 리그를 평정해버렸다.


이 당시의 “창용불패”는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의 마무리”로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물론 선동열의 “국보급” 피칭과 견줄 수 있겠느냐마는, 선동열 외에 임창용의 포스를 능가할 마무리 투수는 아직 없다. 이상훈은 국내에서 마무리로 전성기를 보낸 기간이 너무 짧았고, 구대성과 김용수는 꾸준했으되 엄청난 카리스마가 부족했다. 오늘날 최고의 마무리로 인정받는 오승환이나 한기주의 “돌직구”도 당시 임창용의 “뱀직구” 앞에서는 초라해질 정도이다.


모기업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1999년 임창용은 삼성으로 둥지를 옮겼다. 당시 삼성에서는 최정상급 좌타자였던 양준혁에 선수 둘(곽채진 황두성)을 더 얹어주었고, 여기에 30억의 뒷돈까지 주었다는 소문도 무성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임창용의 가치는 충분히 증명된다. 트레이드 전까지 해태에서 네 시즌을 뛰었던 임창용은 불펜에서만 400이닝 이상을 던지며 평균자책 2.68을 기록했고, 마무리 투수로 뛴 두 해만에 60세이브를 기록하는 괴력을 보여주었으며, 당시에는 WHIP의 개념이 없었는데 마무리로 뛴 두 해의 WHIP은 단 0.99에 불과했다.


최고의 마무리 임창용을 받은 삼성은 그야말로 임창용이 만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 아낌없이 써먹었다. 그래서 붙여진 새 별명이 “애니콜”. 삼성에서는 모구단의 제품명을 별명으로 붙여주어 홍보효과가 있다고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마무리 투수에게 “애니콜”이라는 별명은 결코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1999년 이적하자마자 임창용은 무려 71경기에서 138이닝을 던졌다. 마무리 투수가 6회부터 등판할 정도였으니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역대 최고의 타고투저로 기록되는 이 해, 가뜩이나 장타가 많기로 유명했던 대구를 홈구장으로 쓰면서 임창용은 2.14의 평균자책으로 방어율 2위에 오르며 38개의 세이브를 올렸다. 세이브는 리그 최다, 당시 공식 기록인 세이브포인트는 진필중에 이어 2위였다. 그러나 임창용은 플레이오프에서 결정적인 패전을 연거푸 기록하며 다시 만화처럼 고개를 떨구어야 했다.


창단 이래 실질적인 한국시리즈 우승이 한 차례도 없었던 삼성의 입장에서 임창용은 “우승 청부사”였다. 그러나 임창용만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2001년, 삼성은 김응용 감독까지 영입하기에 이른다. 해태 시절 자신을 발굴해준 김응용 감독과의 재회는 임창용의 커리어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선발 전환. 노장진이라는 마무리가 있었기에 임창용은 부담 없이 선발로 전환했고, 세 해 동안 44승을 올리며 팀의 중심투수로 활약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2년, 삼성의 첫 우승순간 임창용은 팀의 2선발로 (비록 패전을 기록했지만) 팀 우승에 일조하면서 4년 만에 징크스에 마침표를 찍고, “우승청부사”의 역할을 완수했다.


팀이 우승하자, 마치 국내에서는 이룰 것을 다 이루었다는 듯 임창용은 해외 진출을 원했다. 일곱 시즌을 뛰었으니 진출 자격은 되었으나 정작 그에게 관심을 보이던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포스팅 시스템에서 낮은 금액을 입찰하면서 삼성의 반대로 해외 진출은 무산되었다. 어쩌면 이 때 임창용은 삼성과 한국 프로야구에서 마음이 떠났는지 모른다.


2003년까지 선발로 뛴 임창용은, 2004년 선동열 코치의 부임과 함께 다시 마무리로 보직을 바꾸었다. 노장진의 부진으로 마무리에 공백이 생긴 삼성은 다시 “애니콜”을 불렀다. 그 해 임창용은 36세이브로 여유 있게 생애 두 번째 구원왕에 오른다. 어떻게 보면 그의 경력에 비해 두 번의 구원왕 타이틀은 너무 횟수가 적은 감도 있다. 전성기의 진필중이 그의 앞을 두 번이나 막았기 때문인데, 진필중이 구원왕을 차지한 1999~2000년의 기록을 보면, 단순 스탯은 임창용이 진필중보다 준수하다. 평균자책은 0.4 정도, WHIP은 0.2 정도 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타이틀을 내주었으니 임창용으로서는 억울할 만도 하다.


2004 시즌이 끝난 뒤 FA 자격을 취득한 임창용은 주저 없이 해외 진출을 원했다. 그러나 에이전트 문제가 꼬이면서 지지부진한 협상은 결렬되었고 미국과 일본진출에 모두 실패하자 어쩔 수 없이 삼성과 재계약하며 국내에 남았다. 사실 그럴 만했다. 이미 임창용의 주무기는 무뎌지고 있었고, 언제 고장 나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팔꿈치에 과부하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여론도 좋지 못했다. 불미스러운 사건, 해외 진출 과정에서의 잡음 등으로 그에 대한 평가는 최악이었다.


데뷔 후 10년 동안 1200 이닝 이상을 던진 옆구리 투수의 팔꿈치가 성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터. 의욕까지 상실한 임창용은 2005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결국 시즌을 마친 뒤 수술을 택했다. 긴 재활로 2006년을 통째로 날린 임창용의 전성기는 완전히 끝난 듯했다. 실력으로 승부하고 싶어도 수술한 팔꿈치에서 뿌리는 직구는 예전의 스피드를 회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삼성은 선동열 감독이 공들여 완성한 막강한 불펜이 이미 갖추어졌고, 임창용의 공백은 오승환이라는 신인이 너무도 알차게 메워버렸다. 주무기를 상실하고 자리까지 빼앗긴 임창용은 의욕을 상실한 듯 선발과 불펜에서 듬직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만약 이쯤에서 스포트라이트 밖으로 밀려났다면 만화 속 주인공이 아니리라. 2007 시즌을 마치고 임창용은 엉뚱하게도 일본행을 선언했다. 해외 진출을 원하면 구단이 협조한다는 계약조항이 있어 그의 일본행은 크게 걸림돌이 없었지만, 이미 전성기를 지났고 부상경력까지 있는 선수가 일본 리그에서 성공할 것이라 믿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전성기 시절에는 메이저리그에서도 관심을 보였다던 그의 “뱀직구”는 더 이상 없지 않은가. 실제로 일본 야쿠르트에서 제시한 몸값도 높지 않았다. 그러니까, 임창용의 일본 진출은 문자 그대로 그저 “도전”이었다. 이상훈이 좋은 조건을 다 뿌리치고 해외로 나갔던 것처럼, 임창용도 그렇게 도전을 택한 것이다.


임창용의 일본진출은 이승엽이나 이병규에 비해 분명 초라하게 다루어졌다. 심지어 같은 시기 같은 팀으로 이적한 다니엘 리오스보다도 관심 밖이었다. 그랬던 임창용은 지금 일본 리그에서 13세이브로 구원 4위에 이름을 올리며 “창용불패”를 재현하고 있다. 국제대회에서 우리 앞을 가로막은 높은 벽이었던 한신의 후지카와나 주니치의 이와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관심이 높았던 이승엽과 이병규, 그리고 리오스의 올 해 일본 성적은 신통치 못하다. 임창용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셈이다.


“칠 테면 쳐보라”는 식으로 계속 던지는 임창용의 직구에 일본 타자들은 타이밍을 잡지 못한다. 사이드암 투수가 갑자기 쓰리쿼터로 벼락같은 직구를 던지는데 수술한 팔꿈치에서 최고 157km라는 거짓말 같은 구속이 나온다. 작년 삼성에서도 같은 폼으로 빠른 직구를 던지기는 했지만 공끝이 무디고 타자들에게 구질이 노출돼 별반 재미를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듯 횡으로 꿈틀대는 속구로 타자들을 농락하고 있는 것이다. 되살아난 “뱀직구”로 19경기에서 그가 내준 점수는 단 2점뿐이다. 평균자책 0.98, WHIP 0.87.


마치 부상과 슬럼프를 극복하고 결국 화려하게 마침표를 찍는 만화 속 주인공처럼, 임창용은 그렇게 일본에서 또 하나의 족적을 남기고 있다. 팔꿈치에는 커다란 수술 흉터가 남아있지만, 그래도 공을 던지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 일본에서 씩씩하게 광속구를 뿌리는 모습은 옛날 그대로이다. 너무 비범해 혹사를 당했고, 너무 비범해 이런저런 잡음도 생겼지만, 그 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비범함으로 임창용은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새로운 2권을 쓰고 있다.


그의 야구 인생이 어떻게 마침표를 찍을지 모르겠지만, 왠지 일본에서 그치지 않고 언젠가는 미국까지 건너가 또 한 번 국내 팬들을 놀래켜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덩치 큰 거포들을 “뱀직구”로 움찔하게 만들 것만 같다. 원래 만화의 결말은 알 수 없는 것 아니던가. 그리고 그가 늘 그렇게 예측불가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ps. 이참에 별명 하나 제안한다. 이연걸(JET LI)을 닮은 얼굴로 제트기 같은 광속구를 던지는 투수이니 “제트 림(JET LIM)”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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