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 지은 삼성 라이온즈. 이러쿵 저러쿵 해도 분명 프로야구 역사상 최강팀을 고를 때 꼭 빠지지 않고 언급될 이름이다. 27년째를 맞고 있는 프로야구에서 4위 아래로 떨어진 것이 단 3번뿐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흔히 삼성을 떠올리면 아무리 못해도 평균 이상은 하는 강팀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러니 올 시즌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을 확정지은 것이 삼성에게 특별히 의의를 부여할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올 시즌 삼성의 4강은 꽤 특별했다. 시즌의 6부능선을 넘을 때쯤까지만 해도, 심지어 팀내에서조차 4강이 힘들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외국인 선수를 모두 퇴출시키는 특단의 리빌딩 조치를 취할 정도로, 올 시즌 삼성은 꽤 힘든 시즌을 보냈다. 그러다 올림픽 브레이크 이후 한화의 갑작스러운 부진으로 5위에서 4위로 올라설 수 있었고, 그렇게 1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삼성의 시즌 중반 부진은 올 해로 5년째를 맞은 선동열 야구의 한계를 뜻하는 것처럼 보였다. 선동열 야구의 특징은, 선발보다도 훨씬 강한 불펜을 앞세워 뒷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는 “지키는 야구”로 요약된다. 우리가 흔히 선발투수나 마무리투수에 들지 못하는 투수들을 미들맨으로 활용하고는 하는데, 삼성의 경우에는 중간에서 믿음을 주지 못하는 투수가 선발이나 2군으로 쫓겨나는 기이한 모습을 보이곤 할 정도였다. 뒷문이 튼튼해 한 점차 승부에서도 쉽게 뒤집히지 않는 저력을 보유한 강팀이었음은 분명하지만, 한 편으로는 “재미없는 야구”라는 오명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올 시즌, 삼성의 투수진이 예년만 못한 것은 기록상으로도 확인된다. 선동열 감독이 삼성에 투수코치로 부임한 후 즉시 3점대로 떨어진 팀 평균자책은 이후 쭉 3점대를 유지하다가 올 시즌 다시 4점대로 치솟고 말았다. 0.250 내외를 유지하던 피안타율도 0.275까지 훌쩍 높아졌다. 어디서 문제가 생겼을까? 최근 4년간 삼성의 팀 평균자책 속에 그 해답이 들어있다.
기록에서 볼 수 있듯, 올 시즌 삼성의 팀 평균자책은 선발투수진의 붕괴의 영향이 크다. 5.23의 선발 평균자책은 8개구단 중 최하위. 심지어 올 해 최악의 시즌을 보낸 LG의 선발 평균자책(5.09)보다도 크게 떨어진다. 오버뮬러, 션, 애니스 등 용병 투수의 활약이 시원치 않았고, 에이스 배영수도 아직 부상 후유증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화려하지는 않아도 4~5선발로 꾸준히 제몫을 해준 전병호도 부진하면서 여러 가지 악재가 겹쳐버린 탓이다. 시즌초 “보험용”으로 이상목 조진호를 영입해두지 않았으면 5인 로테이션을 꾸리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그 와중에 불펜은 여전히 제몫을 했다. 하긴, 최고 마무리 오승환을 비롯해 3년동안 리그 정상급으로 던져준 불펜투수들이 있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 않다. “지키는 야구”의 핵심은 마무리 투수가 아니라 미들맨이다. 5~6회부터 투수를 교체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선동열 감독의 특성상, 2~3이닝을 잘 막아서 오승환에게 연결해줄 투수의 존재가 필수라는 것이다.
그동안 그 역할을 해준 선수들이 이른바 “쌍권총” 권오준과 권혁이다. 다른 팀에 가면 모두 마무리투수로 한 자리씩 차지할 정도의 구위를 가진 선수들이, 그것도 둘씩이나 중간에서 막아주니 삼성의 뒷문이 튼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두 선수가 잦은 등판의 후유증으로 작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6년 홀드 1위 권오준은, 올 해 고작 16.2 이닝만을 던지며 평균자책 4.32의 부진한 모습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상태이다. 권오준이 작년부터 제 몫을 하지 못하자 삼성 불펜의 핵으로 부상한 2007년 홀드 3위의 권혁은, 평균자책 1.32로 표면적으로는 작년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WHIP과 IRS(승계주자실점) 모두 작년보다 못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출장횟수와 평균 투구이닝도 작년만하지 못한 이유, 권혁 역시 권오준처럼 부상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올림픽 예선과 본선 대표팀에 들락날락하면서 더 에너지를 소비한 탓이다.
선발진은 붕괴되었고, 불펜의 핵인 “쌍권총”까지 흔들렸다. 그래도 삼성은 올 해 불펜진의 평균자책은 전체 3위에 해당하는 3.48. 그 위의 두 팀이 SK와 두산이라면 삼성의 불펜은 확실히 기대 이상의 제몫을 한 셈이다. 선동열 야구가 여전히 죽지 않았음을 증명한 것이라 정리해도 무리가 아닐 텐데, 올 해 선동열 야구의 자존심을 살려준 마지막 보루, 그가 바로 정현욱이다.
평균자책 3.43, WHIP 1.29에 10승 4패 10홀드. 기록상으로 보면 괜찮은 활약은 했지만, 그렇다고 팀 불펜의 핵이 될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정현욱의 올 해 활약은 스탯을 좀 더 들여다 보아야 한다. 구원으로 등판한 45경기에서 90.2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 2.58. IRS가 10/28로 다소 높기는 하지만 구원 등판 시 WHIP 1.11에 피안타율 0.217에서 알 수 있듯 타자들이 쉽게 공략할 수 있는 투수가 아니었다. 특히 구원투수가 한 번 등판할 때마다 평균 2이닝을 던지면서 90이닝을 넘겼다는 것은 요즘 프로야구에서 보기 어려운 “혹사”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게다가 정현욱은 선발진의 구멍을 메우기 어려울 때 선발로도 등판해야 했다. 선발 등판이 총 7차례. 물론 선발 등판 시에는 평균자책 5.60에 WHIP 1.73으로 부진한 모습이었으나, 그래도 선동열 감독은 정현욱이 평균 5이닝 이상을 던지게 했다. 올 해 삼성에서 선발로 한 차례라도 등판한 투수들의 평균 투구이닝을 따지면 정현욱은 이상목 윤성환에 이어 3위에 해당한다. 선발이 조금만 부진해도 바로 교체해버리는 선동열 감독의 특성상, 평균자책 5.60의 선발투수가 평균 5이닝 이상을 던지게 한 것은 조금 의아스럽기도 한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정현욱이 없는 불펜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발까지 합친 정현욱의 총 투구이닝은 126이닝. 불펜투수가 규정 이닝을 채워버린 것이다!)
정현욱에 대한 선동열 감독의 신뢰는 팀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등판하는 “지키는 투수”를 확인해보아도 쉽게 드러난다. 올 해 삼성이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등판한 구원투수만 살펴보면, 정현욱은 55이닝을 투구해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다. 클로저 오승환을 뺀 불펜 중에서 정현욱 다음으로 많은 이닝을 맡은 투수는 24.1이닝의 권혁. 올 해 50경기에 구원 등판해 65.2이닝을 던진 안지만은, 리드 상황에서는 20이닝만을 던졌을 뿐이다. 이런 점만 보아도 선동열 감독이 특유의 “지키는 야구”의 핵으로 정현욱을 활용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현욱이 버텨준 덕분에 다시금 4강에 오를 수 있었던 삼성. 삼성의 이번 4강이 더 특별한 이유는, 이러는 과정에서 타선의 리빌딩까지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리빌딩 기간에는 팀의 전력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지사. 하지만 삼성은 대대적인 리빌딩 과정에서도 결국 4강을 이루어내며 강팀의 면모를 과시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기어이 4강의 문턱을 밟았기 때문에 리빌딩의 주역들은 더욱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노쇠한 타선”을 확 물갈이한 최형우 박석민 채태인 우동균 등 젊은 주역들이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삼성의 “특별한 4강”을 이끈 정현욱에게도 넘어야 할 과제는 있다. 선발이 약한 삼성은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하는 포스트시즌이 버거울 수밖에 없다. 자연히 정현욱에게 더 많은 역할이 부여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정현욱은 올 해 하위팀인 LG KIA 히어로즈에게 유독 강했던 반면, SK와 롯데전에서는 다소 부진했었다. 구원등판만 놓고 보더라도, 준플레이오프 상대인 롯데전의 평균자책이 5.40이다. 롯데와 두산을 넘어 SK까지 상대하려면 좀 더 버겁다. SK전 구원등판 시 평균자책 4.15, WHIP 1.77, 피안타율은 0.340까지 치솟는다.
2007년 군 제대 후 작년에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올 시즌 당당히 팀의 중심으로 거듭난 정현욱. 삼성의 김응용 사장은 정현욱을 보면서 “작살내는 피처”라고 표현했었다고 한다. 군 공백을 빼더라도 여덟 시즌을 보내고 있는 30살의 이 투수가 포스트시즌의 중압감마저 극복하고 좋은 결과를 거둔다면, 타선의 리빌딩을 마치고 “쌍권총”의 부활을 기다리는 내년 삼성의 전력에 커다란 열쇠가 되어줄 것이 분명하다.
- 인용한 기록은 아이스탯(
www.istat.co.kr)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