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선취점을 뽑은 팀이 경기에 이길 확률이 높다. 이것은 테이블세터와 중심타선의 역할분담이 중요시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가령, 한 경기에 9번의 공격을 하면서 선두타자로 나오는 선수는 1번타자일 수도 있고 8번타자일 수도 있다. 9번의 공격 중 찬스를 해결해줄 선수가 4번타자일 수도 있고 9번타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1회는 1번타자부터 시작한다는 것이고, 1회에 찬스를 잡으면 그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4번타자라는 점이다. 그러니 출루율 높은 테이블세터와 해결사 자질이 있는 중심타선은 모든 팀에 꼭 필요하다.
선취점이 승리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통계를 보아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올 시즌 경기에서 선취점을 뽑은 팀이 승리할 확률은 무려 0.687(344승 157패). 1위 SK의 승률보다도 높다. 그러니 과장을 보태 정리하면, 한 팀이 126경기 전 경기에서 선취점을 뽑는다면 1위도 할 수 있다는 소리이다. 최하위 LG도 선취점을 뽑은 경기에서는 0.564의 승률을 기록했다. 선취점을 뽑은 경기에서 승리할 확률이 그렇지 않은 경기보다 높다는 것의 확실한 반증이다.
<선취점에 따른 8개구단의 승률>
올 시즌 두산이 상대적으로 약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여유 있게 2위에 오른 “미라클”을 보여준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바로 선취점이다. 두산이 선취점을 뽑은 경기는 73경기. 1위 SK와 똑같이 8개구단 중 가장 많은 숫자이다. 그리고 두산은 선취점을 뽑은 경기에서 0.671의 승률을 기록했으니, 시즌 승률 0.556보다 월등히 높은 전적이다. 여기에는 8개구단 중 가장 우수한 테이블 세터를 보유한 구단이라는 점의 메리트보다도 확실한 해결사 김동주의 존재가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8개구단의 이닝별 득점현황>
두산은 올 시즌 647점의 득점을 올리는 중에 1회에만 118개의 득점을 쓸어 담았다. 126경기에서 118점을 올린 것은 한 경기 평균 0.94점, 즉, 어지간한 경기는 1회에 한 점씩 얻고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1회에 두 번째로 많은 득점을 올린 롯데(83점)보다도 무려 35점이 더 많고, 하위팀인 히어로즈(55점)나 LG(50점)보다는 두 배 이상 많은 점수이다. 팀의 총 득점 중 1회에 뽑은 점수의 비중만 18%. 하여튼, 대단한 기선제압이다.
김동주가 대단한 것은, 1회에 118점의 점수를 뽑을 때 김동주 혼자서만 40개의 타점을 올렸다는 점이다. (40 타점은 이현곤의 시즌 타점과 같은 숫자이다. 김동주가 1회만 뛰었어도 그는 타점 40걸 안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올 시즌 김동주의 시즌 타율이 0.309, OPS가 0.916인데, 1회에 타석에 들어선 것만 따로 뽑아 계산하면 타율 0.379, OPS 1.040의 무시무시한 성적이 나온다. 그 뿐인가. 1회에 득점권 상황일 때 타석에 들어선 것만 계산하면 타율 0.422, OPS 1.100까지 올라간다. 즉, 두산은 1회 득점권에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4할 타자가 차곡차곡 점수를 쓸어 담아주었다는 뜻이다.
<두산 주요선수들의 1회 타점>
<두산 주요선수들의 1회 득점권 타점>
김동주와 함께 두산의 중심타선을 구성하는 김현수와 홍성흔도 물론 1회에 매서운 공격력을 보여주었으나, 김동주에 비하면 확실히 약하다. 김현수의 경우 3번타자로 출전한 경기에서 1회에 득점권 상황이 타석에 들어서면 타율이 0.269로 떨어진다. 타점은 단 4개뿐. 홍성흔은 1회에만 22타점을 올리며 만만치 않은 클러치 능력을 보여주었으나, 1회의 득점권타율은 0.314로 팀 평균(0.344)보다 조금 못하다. 즉, 두산의 클린업 트리오의 중심, 김동주의 가공할 방망이가 두산의 선취점의 중심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차곡차곡 타점을 올리며, 김동주는 올 시즌 104 타점으로 가르시아에 이어 타점 부문 2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니, 두산의 입장에서는 김동주 없이 시작할 뻔했던 올 시즌이 위험천만했던 셈이다. 일본 진출이 기정사실화되면서 FA 협상도 성의 없이 끝낸 데다가, 일본 진출 불발 후에도 1년 계약만 맺으며 두산에 큰 미련이 없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팬들의 여론도 다소 부정적으로 흘렀었다. 게다가 잔부상이 많기 때문에 결장이나 교체아웃이 많은 편이라 4번타자로서의 위압감이 예전만 못하다는 말도 많다. 일찌감치 교체되는 날이 많다는 것은 경기 막판 해결사가 필요한 시급한 순간에 벤치에 앉아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팀에 마이너스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올 해 7회 이후에 김동주의 타석은 126번인데 이것은 백업멤버 오재원의 119번과 거의 비슷하다.
<두산 주요선수들의 7회 이후 타석>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김동주는 김동주다. 가령, 올 해 363 타수를 기록한 김동주가 타점 1위 가르시아와 똑같은 460 타수를 기록했다면, 그의 타점은 산술적으로 130점을 훌쩍 넘는다. 무려 53개의 홈런을 날리며 문자 그대로 “사기 유닛”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2003년의 심정수가 460 타수에서 142 타점을 올렸었으니, 올 해 김동주의 활약도 말하자면 “준 사기 유닛” 정도의 클러치 능력을 보여준 셈이다. 올 해 김동주가 기록한 104 타점은, 그의 개인 커리어에서도 “우동수 트리오”의 전성기를 누린 2000년의 106 타점 이후 두 번째로 많은 타점이다.
아마 김동주는 올 해가 끝나면 다시 일본리그의 문을 두드릴 것 같다. 클러치 능력을 갖춘 교타자에 수비력도 평균 이상인데다 10년 가까이 꾸준한 정상급 성적을 보여준 데다가 올림픽 금메달 팀의 중심타자이니, 일본에서도 관심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건이 맞아 일본으로 진출하게 된다면 두산으로서는 커다란 공백이 생기게 되는 셈. 공교롭게도 김동주가 부상 때문에 사실상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2006년, 두산은 4강에 들지 못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2006년부터 “포스트 김동주”로 계속 테스트했던 최준석이 아직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두산으로서는 김동주의 공백은 단지 중심타자 한 명의 공백 이상의 큰 구멍이 될 것이 분명하다.
두산은 항상 시즌이 시작하기 전 전문가들로부터 낮은 평가를 받곤 했다. 그러나 그런 전문가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가 2년 연속 2위에 랭크된 괴력을 보여주었다. 이종욱 김현수 고영민 등 젊은 타자들이 속속 포텐셜을 터뜨리면서 전력의 빈틈을 메워준 덕분이었지만, 그것도 김동주라는 거대한 기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타선에 거대한 기둥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유망주가 포텐셜을 터뜨리는 것은 큰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니 두산의 입장에서는 올 겨울 김동주를 잡지 못하면 내년에 또 한 번 큰 구멍을 안고 시즌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산이 내년에도 다시 한 번 “미라클”을 연출한다면, 그 때는 두산이라는 팀이 진정한 강팀이 될 것이고, 만약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한다면 상대적으로 김동주의 존재감이 더 크게 부각될 것이다.
- 인용한 기록은 아이스탯(
www.istat.co.kr)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