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현의 전성기는 2001년부터 시작했다. 입단하자마자 무섭게 메이저리그로 승격돼 팀의 주전 불펜으로 자리를 잡더니, 결국 3년차인 2001년 팀의 주전 마무리 투수가 되어 포스트시즌이 뒷문을 담당하는 경지에 오른다.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에 등판한 영광도 김병현의 몫이었다. 그 해 김병현의 기록은 5승 6패 19세이브, 2.94의 평균자책과 1.04의 WHIP으로 매우 뛰어났다. 특히나 무시무시했던 것이 그의 탈삼진. 2000년에 무려 14.14의 K/9(9이닝 당 삼진)을 기록하더니, 2001년에도 10.38의 K/9로 메이저리그의 강타자들을 줄줄이 돌려세웠다.
거칠 것 없던 22세의 젊은 청년에게 포스트시즌의 중압감은 없어보였다. 디비전 시리즈에서 한 번 등판해 세이브를 올리며 감을 조율하거니,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세 번 등판해 5이닝 동안 볼넷 하나만 허용하는 완벽한 투구로 세이브 2개를 더 챙긴 것이다. 그리고 월드시리즈. 큰 경기에서도 강하다는 것을 인정받은 김병현은 거대한 상대 양키즈를 상대로 다시 마무리로 오른다. 그리고 결과는 모두가 기억하던 그것이다. 4차전 9회말 2아웃 이후에 동점 투런 홈런, 10회말 2아웃에서 끝내기 역전 홈런을 맞고 패전. 5차전 9회말 2아웃 이후에 다시 동점 솔로 홈런. 그리고 김병현은 끝내 마운드에서 주저앉았다. 당차고 배짱 좋기로 유명한 강심장 선수가 마운드에서 주저앉다니, 그 정도로 월드시리즈의 악몽은 김병현에게도 컸던 셈이다.
물론 김병현이 여기서 주저앉았다면 아마 지금쯤 국내에서 공을 던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병현은 다시 일어섰고, 2002년에도 팀의 주전 마무리 투수로 훨씬 더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8승 3패 36세이브. 그리고 평균자책 2.04. 이 정도 기록이면 누구도 클로저로서의 자질에 이의를 달지 못한다. 23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 정상급 클로저의 대열에 오른 것이다. (하필, 그 이듬해부터 선발 외도와 부상, 그리고 저니맨 생활로 급격한 내리막을 걷게 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김병현을 마운드에 주저앉게 했던 얄궂은 운명의 여신은 2008년 한국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당찬 모습으로 리그를 점령해버린 젊은 선수가, 포스트시즌에서마저 승승장구하다가 마지막 챔피언 결정전에서 극적으로 무릎을 꿇게 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두산의 김현수. 신고선수로 입단해 2년차밖에 되지 않은 20살의 젊은 선수가 타격왕에 오르고, 국가대표에 뽑혀 금메달을 따고, 팀의 준우승을 이끌어 포스트시즌에 서기까지, 김현수의 올 시즌은 흠잡을 곳 없는 완벽 그 자체였다.
김현수의 성적표를 들여다보면 혀를 내두르게 된다. 타율 0.357로 1위, 출루율 0.454로 1위, 최다안타 168개로 1위, 그렇게 타격부문 3관왕. 장타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34개의 2루타(1위)와 5개의 3루타(3위)를 앞세워 전체 두 번째로 높은 0.963의 OPS를 기록. 득점 4위(83개), 타점 5위(89개)로 전형적인 3번타자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13개의 도루로 주력도 만만치 않음을 증명했다. 까다로운 타자가 선구안까지 좋으니 볼넷은 전체 1위(80개), 반면 삼진은 40개밖에 되지 않는다. 자신과 엇비슷한 볼넷을 얻은 팀 동료 고영민의 삼진이 무려 109개였음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상대 투수들에게는 골치 아픈 선구안인 셈이다.
기록상으로 나타나지 않을 뿐, 김현수의 수비 능력도 평균 이상이었다. 펜스에 부딪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허슬 수비는 그의 옆에 있는 이종욱에 뒤지지 않아 과연 두산의 일원다웠고, 수비 범위도 넓어 8개 구단 주전 좌익수 중 가장 많은 2.16의 수비범위(Range Factor; 9이닝 기준으로 수비에 가담한 횟수)를 기록했다.
이런 성적을 토대로, 김현수는 베이징 올림픽 본선에 국가대표 멤버로 참석한다. 이종욱 이용규 이택근 이진영 등 쟁쟁한 선배들이 외야수 명단에 포함되어 있으니 김현수는 대타 요원 정도로 생각되었고, 실제로 출발은 그러했다. 그러나 김현수는 대타로서도 만점 활약을 펼치며 자신의 실력이 절대 요행이 아님을 증명했다. 특히 일본과의 경기에서 특급 마무리 이와세를 상대로 적시타를 날리며 팀의 승리에 기여했던 모습은 김현수의 타격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었다.
김현수는 타석에서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상대의 구질이나 코스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고 투구를 그냥 맞출 뿐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그만큼 순간적인 판단력과 배트 컨트롤이 뛰어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게다. 그렇다고 배트 끝만 조율하며 “똑딱이 안타”를 만들어내는 유형도 아니다. 홈런은 9개에 그쳤으나 OPS 2위에 오를 정도의 장타력이 있기 때문에 극단적인 수비를 펼칠 수도 없다. 그러니 투수들은 골치가 아프다. 집중적으로 공략할 약점이 없기 때문이다. 왼쪽 오른쪽 가리지 않고 타구가 날아가기 때문에 수비 시프트를 쓰기도 애매하다. 이토록 감각적으로 타격을 하는 천재적 모습에 장효조를 비교한다면 너무 오버일까? 김현수가 이 모습 그대로 몇 년의 경력을 더 쌓는다면 불가능도 아니라고 본다.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에서 강팀 일본의 최고 투수를 상대로 해서도 주눅 들지 않았던 김현수에게 포스트시즌의 중압감이 따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김현수는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상대로 0.333의 고타율과 고비마다 터진 적시타로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견인했다. 올 시즌 상대 7개 구단 중 히어로즈 다음으로 성적이 신통치 못했던 상대팀이 삼성이었는데, 그 벽을 넘어선 것이다. 정상에서 맞붙게 된 상대 SK에게는 상대타율 0.382로 아주 강했다. 당연히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의 키플레이어는 김현수였다. 이종욱과 김동주의 컨디션이 좋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다리를 놓을 김현수만 제 몫을 해주며 무시무시한 공격력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과는 거짓말 같았다. 21타수 1안타, 0.048이라는 초라한 타율. 1차전에서 안타 1개를 때린 뒤에는 계속 침묵이었다. 특히 한 점차로 뒤지던 9회말 1사 만루 찬스에서 병살로 게임을 마감했던 3차전은 불길한 징조가 본격화되는 신호였다. 잘 맞춘 타구는 아니었으나 코스가 좋았기 때문에 역전타가 될 수도 있었는데, SK의 기막힌 시프트에 걸려 병살로 마감한 것이다. 4차전에서도 김현수의 타구는 번번이 3루수 정면으로 향했다. 1승 1패에서 자신의 병살타로 시리즈가 열세에 놓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이미 김현수는 자신만의 장점인 “무심”을 놓치고 있었다.
그리고 1승 3패로 시리즈 패배 직전에 놓인 5차전. 두 점을 뒤진 두산은 다시 한 번 9회말에 만루 찬스를 잡았다. 스퀴즈라도 시도해볼 법 했는데 김경문 감독은 끝내 강공을 고집했고, 그 덕분에 다시 한 번 3차전과 똑같은 9회말 1사 만루 상황에 김현수가 들어섰다. 상대 투수는 정대현에서 채병용으로 바뀌었지만 모든 상황은 3차전과 거짓말처럼 똑같았다. 그리고 이미 김현수의 얼굴은 “무심”이 아니었다. 그렇게 조급했을까? 또 한 번 초구를 건드린 김현수의 타구는 투수 글러브에 들어갔고, 1-2-3 병살타로 SK의 우승은 결정되었다.
김현수가 올 시즌 초구부터 방망이가 나갔던 적은 꽤 많다. 그는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괜찮은 공이 들어오면 초구라도 바로 방망이를 내는 타입이다. 올 시즌 두산의 주전급 타자 중 한 타석에서 평균적으로 상대하는 투구수가 김현수보다 적은 타자는 채상병 최승환 홍성흔 뿐이다. 그런데 그 정도로 빠른 승부를 즐기는 김현수도 아무 때나 방망이를 내는 것은 아니다. 올 시즌 18번의 만루 상황에서 김현수가 초구를 공략한 것은 단 6번뿐. 그랬던 김현수가 연거푸 초구를 건드려 병살로 물러난 것은 분명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안타 하나면 동점이 되었을 텐데, 뜬공만 날려도 1점은 쫓아가 역전을 노릴 수 있었을 텐데, 다시 한 번 거짓말 같은 병살타로 무너진 김현수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올림픽에서도 굳건했던 20세의 젊은 선수에게도 한국시리즈 무대는 너무 큰 짐이었던 모양이다.
마운드에서 주저앉은 김병현처럼, 덕아웃으로 들어가며 눈물을 쏟은 김현수의 뒷모습은 상당히 안타까웠다. 3년차의 젊은 이방인 투수가 리그를 호령하다가 극적으로 고개를 떨구었듯, 2년차의 젊은 신고선수 출신의 타자가 리그를 호령하다가 극적으로 눈물을 쏟은 모습은 얄궂은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진 것이다. 당시 경기장을 찾았던 관객들의 전언에 의하면, 김현수는 끝내 시상식에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고 한다. 준우승도 값진 것인데, 그 영광의 순간에 함께 하지 못할 정도로 김현수의 마음의 상처는 크게 남은 모양이다.
그러나 김병현이 상처를 딛고 2002년 리그 최고의 마무리투수로 더 성장했듯, 김현수도 상처를 딛고 더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러쿵저러쿵 해도 김현수는 국내 최고의 좌타자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선수이다. 자신이 마음먹으면 홈런도 더 때릴 수 있고 도루도 더 할 수 있는, 게다가 정확도와 수비 능력까지 갖춘, 완성된 “5툴”에 가장 가까운 선수 중 하나가 김현수이다. 김동주의 해외진출과 홍성흔의 FA를 걱정해야 할 두산이 만약 최악의 상황에 놓인다고 하면, 결국 팀타선의 중심이 되어야 할 사람은 김현수이다. 그러니 그가 상처를 딛고 한 단계 더 성장해서 돌아온다면 상대팀에게는 그야말로 골칫덩어리가 될 것이다. 그에게는 앞으로 써내려갈 전설이 더 많이 남아있다. 그러니, "내년엔 웃는 얼굴로 다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