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투수에 이어 불펜투수도 한 번 정리해보았습니다.
특히나 요즘 야구는 불펜투수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불펜이 경기를 날려먹는 경우는 데미지가 더 크지요. 요즘 네티즌 사이에서는 "작가" 방화범"라는 비아냥 섞인 별명까지 붙여주는데, 그만큼 불펜의 중요성도 점점 인정을 받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가장 튼튼한 불펜은 어디였을까요? 먼저 8개구단 불펜진의 기록입니다.
불펜 기록에서 평균자책은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불펜의 미덕이 불을 끄는 것이라고 했을 때, 불을 끄지 못해도 앞 투수의 자책점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으므로 불펜투수의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평균자책은 부적절합니다. 그래서 요즘 강조되는 기록이 IRS입니다. 앞선 투수가 남겨둔 주자를 얼마나 잘 막고 마무리했는지를 알 수 있는 지표이므로 불펜의 성과를 보기에 알맞습니다.
올 시즌 8개구단의 IRS를 보면 평균 32.5% 정도입니다. 즉, 앞선 투수가 남겨둔 주자 3명 중 1명은 뒤 투수가 실점을 허용했다는 뜻입니다. 팀별로 IRS가 가장 양호한 팀은 SK로 24.9%, 가장 나쁜 팀은 히어로즈로 38.2%입니다. 20%대의 빼어난 IRS는 SK 외에 롯데(26.7%)가 있습니다.
IRS에서도 투수운용 스타일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승계주자가 가장 많았던 팀이 LG(356)인데, 롯대(187)의 거의 두 배에 달합니다. 물론 그만큼 주자를 많이 내보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LG는 주자를 내보내 위기가 되면 투수를 교체하고, 롯데는 가급적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투수를 교체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뜻도 됩니다.
그 외에 평균자첵 대신 살펴볼만한 기록이 WHIP과 피안타율입니다. 평균자책은 SK가 가장 좋지만, WHIP과 피안타율로 따지면 두산이 가장 좋습니다. 앞서 선발진을 살펴볼 때 두산의 허약한 선발을 확인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산의 실점이 적었던 것은 튼튼한 불펜의 공입니다. 물론 하위팀으로 갈수록 불펜의 안정성은 크게 떨어지구요.
전통적으로 불펜이 가장 튼튼했던 삼성은 예년에 비해 많이 무뎌진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의 기록에 눈길이 가는 부분은, 불펜투수들의 패전이 단 9차례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구원투수가 올라와서 불을 지르고 역전패당하는 경우가 가장 적었다는 뜻이죠. WHIP이나 IRS 등으로 보면 과거의 불펜왕국의 명성이 무색하지만, 그래도 뒷문이 견고하기는 여전하다는 것이겠죠.
불펜의 투구이닝이 가장 많은 팀도 역시 SK와 삼성입니다. 특히 SK는 홀드가 타팀에 비해 몇 배나 많을 정도입니다. 이기는 경기에서도 불펜을 총동원했다는 뜻이구요. 반대로 최하위 LG도 홀드가 3번째로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기는 경기에서만큼은 투수들을 아끼지 않았다는 뜻일겁니다. 불펜이 가장 허약했던 팀은 히어로즈인데, 불펜의 패전만 28차례나 됩니다.
아래는 구단별 불펜투수의 투구이닝을 그래프로 나타낸 것입니다. 선발투수와 달리 구원투수는 에이스급을 정하는 기준이 애매해서 그냥 평균 이상과 이하로만 구분했습니다. 평균자책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WHIP이 불펜진 전체평균(1.36) 이상인 경우가 빨간색, 미만인 경우는 파란색으로 구분합니다.
빨간 꼭지가 가장 두드러지게 튀어나온 팀이 SK 두산 삼성 KIA인데, 그만큼 좋은 불펜투수가 여럿 있었다는 뜻입니다. 반면 한화는 불펜 자원이 많지 않아 마정길-토마스에 많이 몰려있음을 알 수 있고, 히어로즈와 LG는 사정이 더 심각해서 평균보다 낮은 WHIP을 기록한 투수들이 마당쇠 역할을 해야 했을 정도입니다. 롯데는 선발이 긴 이닝을 버티는만큼 불펜의 투구이닝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불펜의 튼튼함을 이야기할 때는 거의 박빙의 승부 또는 이기고 있는 경기를 마무리하는 능력을 따집니다. 그런데 불펜투수의 기록에는 패배가 확정된 순간에 나오는 경우도 포함되기 때문에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팀이 리드하고 있는 상황, 동점인 상황에서의 불펜투수의 그래프만 따로 모았습니다.
모든 투수가 골고루 나눠 던지는 역할분담이 인상적입니다. 정우람 정대현의 투구이닝이 많지만, 윤길현 조웅천 김원형 등이 부담을 덜어주기 때문에 안정적인 불펜 운용이 가능합니다.
두산의 튼튼한 불펜은 사실 세 명의 투수 덕분입니다. 동점 상황에서는 이재우, 리드할 때는 임태훈. 동점 상황에서 가장 많은 이닝을 던진 이재우는 덕분에 불펜투수로 10승투수 대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사실 후반기 임태훈이 다소 부진할 때 위기가 올 수도 있었지만, 김상현이 급성장하면서 또 한 명의 필승 계투조를 이루었습니다.
선발 로테이션이 가장 확실했던 롯데는, 그만큼 불펜투수들의 투구이닝도 적고 등판한 투수 자체가 가장 적습니다. 그 중에서 뒷문이 불안했던 점도 없지 않지만 최향남 임경완 코르테스 등이 번갈아 마무리를 맡으며 나름 선방했습니다. 좌완 스페셜리스트 강영식은 로이스터 감독이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불펜입니다.
삼성은 불펜왕국답게 가장 많은 투수들이 등판했고 투구이닝도 가장 많습니다. 그러나 "권총"(권오준 권오원 권혁)이 맹활약하던 시절과 달리, 주요 불펜투수들의 부상 때문에 정현욱과 권혁이 많은 짐을 떠맡았습니다. 특히 경기 중반 이후 리드를 잡으면 어김없이 등판했던 정현욱은 불펜으로만 90이닝 이상 던져야 했습니다. 권혁이 정상 컨디션이라면 셋업맨을 맡았겠지만, 오히려 리드 상황에서 권혁의 등판은 많지 않습니다.
한화는 선발진도 류현진이 홀로 끌고 왔는데, 불펜은 마정길과 토마스 두 명이 힘겹게 끌고간 셈입니다. 안영명과 최영필이 작년만 못했고, 윤규진의 부상 등으로 불펜 자원이 충분치 못했습니다. 마정길은 불펜 투구이닝(92.2이닝)이 가장 많았던 투수입니다.
마무리 한기주 외에 KIA의 불펜을 이끈 선수는 유동훈과 손영민, 모두 잠수함 투수입니다. 반면 좌완 양현종 문현정은 기대보다 활약이 더뎌 불펜이 한 쪽으로만 쏠린 경향이 있습니다. 투수진은 풍부하지만, 불펜은 선발진만큼 안정적으로 꾸리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불펜이 가장 허약했던 히어로즈. 사실상 긴박한 상황에서는 송신영 혼자 다 떠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나마 순위 경쟁에서 탈락한 후반기에는 다른 투수들을 기용하기도 했지만, 송신영에게 너무 집중된 불펜 운영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황두성 조용훈 박준수 등 좋은 불펜투수가 많았기 때문에 아쉬운 대목입니다.
시즌 초 정재복에게 너무 집중되어 있던 LG 불펜은, 후반기 들어 이재영과 우규민이 짐을 많이 나눴습니다. 마무리로 보직을 바꾼 정재복은, 정작 마무리로 등판할 기회가 많지 않아 쉬는 날이 많아졌고, 대신 셋업맨 역할을 맡은 이재영이 후반기에 자주 모습을 보였습니다. 마무리에서 탈락했던 우규민도 중간계투로 감을 조율했는데 2007년만큼의 구위는 살리지 못했습니다.
정리하자면, SK는 골고루 잘 던진 튼튼한 불펜이었고, 두산과 삼성은 특출난 2~3명의 불펜으로 튼튼하게 뒷문을 잠근 경우였습니다. 롯데와 KIA는 무난했지만 약점이 있었고, 한화와 LG는 가용자원이 부족해 힘겹게 틀어막았고, 히어로즈는 가용자원이 있었음에도 불펜이 신통치 못했던 셈입니다.
돌이켜보면, 불펜투수로 성공한 이들이 오랫동안 강한 포스를 유지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개 잦은 등판의 후유증으로 부상이 찾아오거나 구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 삼성이 그런 싸이클에 걸려 있는 듯싶습니다. SK 정도의 선수층이 아니라면 어느 팀이나 이런 굴곡을 피해갈 수 없을 것 같기에, 내년에는 올해와 전혀 다른 양상을 볼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인용한 기록은 아이스탯(www.istat.co.kr)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