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시즌이 한국시리즈까지 끝나고 난 후, 야구팬의 관심을 모았던 이슈중 하나가 바로 FA이다. 매년마다 누가 FA 자격을 얻을지, 그리고 누가 FA로 팀을 옮길지, 그리고 누가 얼마의 몸값을 받게 될지, 보상선수는 누가 이동할지 등등, FA와 관련된 이슈는 끝없이 쏟아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올 해는 자격을 취득한 27명의 FA 중 손민한 박진만 같은 대스타와 이진영 정성훈 등 젊은 스타급 선수들까지 두루 포함되어 있어 더욱 뜨거운 스토브리그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리고 27명의 FA 자격취득 선수 중 11명이 권리행사를 신청했다. 한 마디로 시장에 나온 것이다. 그 중에는 해외진출이 유력한 선수도 있고, 어지간해서는 타팀 이적이 어려울 것 같은 노장도 있다. 하지만 그들보다도 더 눈에 띄었던 것은 “있는 이름”이 아니라 “없는 이름”이었다. 투수보다 야수가 많은 올 해 FA의 상황 속에서 가장 눈에 띄던 선발투수, 바로 김수경이 그 주인공이다.
김수경은 올 해 FA 권리행사를 신청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냥 소속팀인 히어로즈에 남아 재계약을 하겠다는 뜻이다. 비록 큰 부상 전력이 있고 올 해 부상 후유증으로 성적이 신통치 못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김수경이다. 고졸신인으로 입단하자마자 첫 해인 1998년 12승을 올리며 신인왕을 수상했고, 2000년에는 정민태 임선동과 함께 18승으로 공동 다승왕까지 오르며 완전한 리그 톱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던, 그리고 비록 부상 때문에 부침이 있었지만 유니콘스에서 10시즌동안 일곱 번이나 두 자리 승수를 기록했던 바로 그 김수경 말이다.
수요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투수진이 구멍난 LG는 공개적으로 FA 김수경 영입을 선언하기도 했다. “부자 구단”이 경쟁에 뛰어들겠다는데 히어로즈가 경쟁이 될 리가 없었다. 2000년 다승왕 이후 부상 때문에 평균자책이나 탈삼진 능력은 점차 하향곡선을 그렸지만, 그래도 부상을 딛고 작년부터 부활의 가능성을 보였던 그다. 올 해도 시즌 초에는 부상으로 인해 이탈했지만, 후반기에는 6경기에서 평균자책 1.70의 완전히 부활한 모습으로 돌아왔기에 “FA 대박”은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게다가 김수경 개인에게 있어서도 FA는 묘하게 인연이 없었기에 더욱 의미가 깊을 것으로 보였다. 그는 2006 시즌이 끝난 뒤 FA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부상 때문에 그 해 성적이 좋지 못했고 유니콘스도 김재박 감독의 이적과 모기업 지원 중단 등으로 뒤숭숭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FA 권리행사를 스스로 포기했다. 한 해 미룬 FA는 2007 시즌이 끝난 뒤에도 순탄치 못했다. 유니콘스가 히어로즈로 넘어가면서 FA 자격이 완전히 백지화된 것이다. 대박은 고사하고 연봉까지 삭감 당했고 겨우내 다른 고참급 선수들과 함께 죄인이라도 된 듯한 대접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다시 찾은 FA를, 김수경은 미련 없이 포기했다. 왜? 바로 김시진 신임감독 때문이다. 유니콘스 시절 투수코치로 자신을 길러준 은사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사령탑에 올랐는데, 주축 선수가 되어야 할 자신이 다른 팀으로 옮기는 것은 의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히어로즈가 올 해부터는 연봉 협상 시 제대로 된 대우를 해주겠다고 이야기는 하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 상태에서 예고된 대박을 포기하고 잔류를 선언한 김수경의 “의리”는 분명 시선을 모으기 충분하다.
김수경까지 잔류를 선언했으니, 히어로즈는 검증된 장원삼 마일영 좌완 듀오에 황두성과 이현승, 그리고 상무에서 영점을 다시 조정한 오재영까지 더해 어느 팀에 꿇리지 않을 선발진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팀 전력은 과거 유니콘스의 명성을 재현하기 부족해 보이지만, 투수력을 바탕으로 왕좌에 오른 유니콘스의 주역들이 히어로즈에서 뭉친다면 하위권에 머물 전력은 아닐 것이라고 예상된다. 게다가 유니콘스의 전성기를 이끈 아이콘 정민태도 히어로즈의 투수코치로 복귀했다. 김시진 정민태 그리고 김수경까지, 2000년대 초 다른 팀에게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던 유니콘스 투수진의 주축이 뭉친 것만으로도 그 존재감은 상당하다.
김수경이 올 겨울 1년 계약을 할지 다년 계약을 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다년 계약을 금지하는 KBO의 수칙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단장들의 결의가 실현된다면 김수경은 내년에 다시 한 번 FA 자격을 취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009 시즌에 팀을 멋들어지게 끌어올린다면 김수경은 내년에 다시 한 번 홀가분하게 “대박”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동안 인연이 없었던, 그리고 “의리” 때문에 스스로 인연을 포기했던, FA와의 인연이 내년에는 좋은 소식으로 다가오기를 바란다. 돈을 무시할 수 없는 프로의 세계에서 돈 대신 의리를 택한 젊은 청년이 근사하게 성공하는 해피엔딩까지는 보여주어야, 이런 세상도 조금은 더 살 맛 나는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