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이 끝나고 겨울이 오면 “스토브 리그”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스토브(stove), 즉 난로에 앉아서 따뜻하게 다음 시즌을 준비할 시기, 그러나 항상 이맘때는 “스토브”의 훈훈함과 거리가 먼 칼바람이 몰아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누군가는 방출되어 더 이상 선수생명을 이어가지 못하고, 누군가는 강제로 은퇴로 떠밀리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올 스토브 리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진영 정성훈 홍성흔 등의 FA 이적이 전해지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음지에서 조용히 선수생활의 벼랑으로 몰린 선수들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 출발은 마해영이었다. LG에서 방출된 후 고향팀 롯데에 입단해 마지막 선수생활의 의지를 불살랐으나, 2008 시즌 32경기에서 고작 0.153의 초라한 타율과 단 2개의 홈런만 기록한 채 시즌의 절반 이상을 2군에서 보내야 했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방출 통보였다.
롯데는 오랫동안 타지를 떠돌다 고향으로 돌아온 옛 프랜차이즈 스타에게 코치연수를 제안했다. 하지만 안정된 코치직도 선수생활의 의지가 강한 선수에게는 섭섭한 대우일 뿐이다. 선수생활의 욕심이 남은 마해영은 이것을 거절하고 대만 리그 입단을 타진하다가 결국 어쩔 수 없는 은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찾아온 “마포 종점”. 마해영은 자신이 거절한 코치직 대신 해설자 자리에 도전하려는 듯싶다.
마해영의 팀동료 염종석은 조금 더 안타깝다. 마해영이 2008 시즌 성적이 부진했다면, 염종석은 부상 후유증을 극복한 선수 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올렸기 때문이다. 21경기에서 중간계투로 나와 평균자책 3.52를 기록하며 홀드 3개를 올렸다. 롯데의 투수진이 튼튼하다고는 하지만, 경쟁력이 떨어지는 형편없는 기록은 분명 아니다. 게다가 염종석은 통산 93승을 기록 중이다. 단 7승만 더 보태면 100승이라는 상징적인 성취를 올릴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롯데는 염종석의 선수생활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고, 타팀에서 관심을 보였지만 염종석은 결국 은퇴를 택해 영원한 “롯데 맨”으로 남는 쪽을 택했다.
마해영과 염종석의 강제적인 은퇴가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두 선수는 롯데의 투타에 있어서 전성기를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염종석은 1992년 롯데 우승의 1등 공신인 동시에, 우승을 위한 짐을 혼자 짊어진 신인의 굴레로 오랜 기간 동안 부상에 시달려야 했던 선수이다. 마해영은 지금도 롯데 팬들이 가장 화끈한 중심타선으로 기억하는 기둥이다. 비록 마해영이 우승반지는 삼성에서 끼게 되었지만, 롯데가 2000년을 전후로 화끈하게 불타오르던 시절에는 임수혁과 박정태-호세를 거느린 마해영이 중심에 있었다.
전성기를 상징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를 선수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로 그라운드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물론 구단에서도 할 말은 많을 것이다. 이들처럼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한 이들은 기본적으로 연봉이 높을 수밖에 없다. 자연히 연봉 대비 팀 공헌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고, 젊은 유망주의 출장기회를 빼앗는다는 눈총을 받기도 한다. 신인 선수는 계속 들어오는데 고참이 은퇴하지 않으면 한정된 엔트리를 채우기 버겁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해영과 염종석 정도의 고참이라면 사정이 다르다고 본다. 이들은 팀을 상징하는 인물이고, 팀의 팬들을 결속시키는 아이콘이다. 코치와는 또 다른 위치에서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해줄 멘토이며, 유망주의 롤 모델이 될 주춧돌이기도 하다. 팀의 영광의 순간에 중심이 된 선수들이라면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그런 역할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어있다. 그런 고참을 강제적으로 은퇴시킨다면 후배들은 무엇을 배울까? 자신이 팀에 헌신해봐야 강제로 그라운드에서 끌어내려질 것이라 지레 겁먹게 되지는 않을까?
이런 뒤안길은 비단 롯데의 문제만이 아니다. 올 스토브 리그에서 롯데 못지않게 팬들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며 고참을 정리한 팀이 두산이다. 그 대상은 안경현. 이미 작년부터 동계훈련에 제외되며 팀의 전력외 선수로 분류되더니, 결국 방출의 길을 피할 수 없었다. 본인의 선수생활 연장의 의지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은 안경현의 모습을 보게 될 가능성도 높다. 1992년부터 17년간 OB-두산의 유니폼을 입고 두 번의 우승반지를 끼었던 선수치고 너무도 쓸쓸한 퇴장 아닌가.
안경현은 성실함과 꾸준함을 갖춘 선수가 오랫동안 제몫을 하며 팀에 보이지 않게 공헌하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3루수가 필요하면 3루에, 2루수가 필요하면 2루에, 1루수가 필요하면 1루에 섰다. 2006년 김동주의 부상으로 4번타자 공백이 생기자 실질적인 4번타자가 되어준 것도 안경현이었다. 늘 두산에 구멍이 생기면 그것을 메워준 것이 안경현이었고, 그것이 17년 동안의 선수생활 동안 통산타율 0.275의 준수한 성적으로 증명되었다.
그런 안경현도 결국 두산을 떠났다. 홍성흔의 롯데 이적으로 우타자의 공백을 염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오재원과 최준석이 포텐셜을 터뜨리지 못해 확고한 1루수 자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산은 안경현을 미련 없이 포기했다. 그렇게 두산 팬들은 또 하나의 추억을 박탈당했다. 이제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안경현의 모습은 그저 사진과 옛 동영상을 통해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비슷한 예로 이종범을 꼽을 수 있다는 점도 서글프다. 이종범이 누구인가? 한국야구를 대표했던 스타 중의 스타이다. 모그룹의 형편이 어려워져 팀 운영이 쉽지 않던 시절에도 타이거즈의 전성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선동열과 이종범 덕분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종범의 성적이 형편없었던 것도 아니다. 2008 시즌 110경기에서 0.284의 타율로 후배들보다 못하지 않는 성적을 거두었고, 무엇보다 기록상으로 나타나지 않는 파이팅이 인상적이었음을 똑똑히 기억한다. 시즌 초 최하위를 헤매던 KIA가 한때 4강을 넘볼 정도로 치고 올라갈 때, 그 신바람의 동력이 이종범이었음은 자명한 사실인데, 그런 이종범도 사실상 은퇴를 강요받고 있는 지경이다. 옵션을 걸어, 내년에 옵션을 달성하지 못하면 은퇴하는 것에 합의하라는 굴욕적인 대우까지 받고 있지 않은가.
앞서 언급했듯, 결국 프로의 생리는 최대효과를 찾아 움직이기 때문에 고참들을 정리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도 있다. 혹자는 눈치 주기 전에 고참들이 알아서 물러서는 용단을 내리는 것이 미덕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한화를 예로 들며 “노인정”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붙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한화가 꾸준히 4강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과연 류현진과 김태균 등 젊은 선수들만의 힘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최근 몇 년간을 보면, 장기간의 리그가 진행되는 도중 위기가 찾아왔을 때 어지간해서는 어느 선 이하까지 떨어지지 않는 팀이 한화와 삼성이었다. 하필 두 팀에 고참이 가장 많다는 것이 단지 우연일까?
고참의 힘을 우습게 봤다가 대가를 톡톡히 치른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LG이다. 팀의 레전드라 할 수 있는 김용수의 쓸쓸한 은퇴는 어떠했는가? 1998년 선발로 18승을 거두고, 1999년 마무리로 26세이브를 기록한 선수가, 단지 2000년에 부진했다는 이유만으로 더 이상 선수생활이 어렵다고 보고 강제로 은퇴를 시켜버렸다. 등번호(41)만큼 선수생활을 하고 싶다던 김용수의 바램은, 결국 만 40세의 문턱에서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사실상 김용수의 은퇴경기나 다름없던 2000년 플레이오프 6차전, 당시 중간계투로 나와 호투하던 김용수가 아웃카운트 하나를 남기고 강판 당하던 순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내려가기 싫다고 강한 집착을 보였으나 결국 신예 마무리 장문석에게 마운드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고,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드라마의 연출이었다.
LG는 이후에도 고참 선수들이 줄줄이 강제로 팀을 떠났다. 팀의 전성기를 지킨 김용수뿐 아니라 이상훈 유지현 서용빈 김재현은 모두 팀과의 결별이 깔끔하지 못했다. 그러던 사이 그렇게 고참을 밀어내고 기회를 얻은 LG의 무수한 유망주 중 살아남은 이는 이승호 이병규 박용택 정도뿐이다. 그마저 이승호와 이병규는 지금 LG에 없고, 박용택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유망주가 보고 배울 고참이 없었고, 팀이 가장 강력했던 시절의 캐미스트리를 간직한 주춧돌이 모두 빠졌던 결과이다. 8개구단 중 가장 오랫동안 가을야구를 해보지 못한 팀이 LG라는 점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작년 스토브 리그에서도 삼성의 김한수나 롯데의 주형광 등 팀의 영광을 간직한 고참들이 반강제적으로 옷을 벗었다. 두 선수 모두 팀의 전성기의 중심이었던 대표적인 선수들이다. 주형광은 부상 때문에 기량이 많이 쇠하였으나, 김한수는 여전히 수비에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을 위해 길을 터주라는 압박을 받곤 했다. 그들이 그렇게 “종점”에 도달했듯이, 올 해도 마해영 염종석 안경현 이종범 등 많은 선수들이 “종점”을 강요받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의 “종점”이 과연 팀에게, 젊은 후배에게, 또 팬들에게 좋은 것인지, 구단들이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