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47 “추억”
그의 등번호는 47. 씩씩하게 마운드에 올라가 시원하게 공을 뿌렸다. 그의 왼팔에서 나오는 150km 언저리의 강속구는 구속 이상의 파워가 있었다. 칠 수 있으면 쳐보라는 식의 기(氣)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슬라이더나 커브도 잘 던졌지만, 그의 레파토리는 누가 뭐래도 직구였다. 복판에 꽂아버려도 방망이가 허공을 가르는 직구.
그는 승부를 즐겼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도 위축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야구가 단체경기라고 하지만 마운드에 선 투수의 파이팅은 팀 전체를 지배한다. 그가 마운드에 서면 동료들은 든든했고 상대팀은 주눅이 들었다. 줄무늬 유니폼, 흩날리는 긴머리, 등번호 47번의 “야생마” 이상훈이다.
이상훈이 일본과 미국을 거쳐 다시 LG로 돌아왔을 때, 냉정히 말해 그의 구위는 전성기에 미치지 못했다. 혈행장애로 많은 이닝을 던질 수도 없었거니와, 복판에 꽂아도 타자가 손도 못 대던 강속구의 볼끝은 전성기보다 무뎌져 있었음은 분명하다. 나이가 들고 미국에서 실패도 겪었지만, 그래도 그의 기(氣)는 여전했다. 여전히 타자와의 싸움을 즐겼고, 터프하게 위기를 막아냈다. 기가 실린 직구는 구속이 몇km 줄었어도 여전히 타자를 압도했고 경기를 지배했다.
이상훈이 감독과 프론트에 의해 쫓겨나다시피 팀을 떠난 뒤, LG 마운드에는 경기를 지배하는 투수가 없었다. 강속구를 던지는 왼손투수가 나오면 LG팬들은 “제2의 이상훈”을 기대했지만 아무도 그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 단지 공이 빠르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타자를 압도하는 기백,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배짱, 아무도 이상훈을 따라갈 수 없었다.
○.. No. 47 “도전”
이상훈이 팀을 떠난 후 3년이 흐르고 LG에는 다시 등번호 47번을 단 왼손 투수가 들어왔다. 아마추어 시절의 명성으로 따지자면 이상훈의 “14타자 연속 K”를 능가하는 “거물”이었다.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일찌감치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 미국으로 진출했고, 그 대단한 커트 실링과 맞상대를 하면서도 씩씩하게 공을 뿌리던 청년이었다.
봉중근. 하지만 냉정히 말해 그는 미국에서 부상으로 인해 이미 하향곡선을 그리던 중이었다. 1회 WBC에 국가대표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의 구위는 국내 리그에 뛰는 선수보다 뛰어날 것이 없었다. 메이저리그로 승격하는 대신 팀을 옮겨 다니기 시작하고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시간이 더 길어진 그 투수가 10억의 계약금을 받고 LG에 입단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미국 물 먹던 선수인데 국내 리그에서 평균은 하겠지”라는 기대는 두어달 만에 무너졌다. 새로운 47번은 2군으로 밀려났다. 메이저리그의 강타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익힌 체인지업 유인구는 국내 타자들에게 전혀 효과가 없었다. 부상 이후 줄어든 구속으로는 타자를 윽박지를 수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네티즌들은 그를 “봉미미”라고 불렀다. 메이저리그 경험이 있는 용병 메존이 봉중근을 두고 “미미한 선수”라고 표현한 것이 발단이었다. “미미한 선수”라는 놀림을 받으며 2군에 내려간 봉중근이 1군에서 남긴 것은 안경현과의 격투극 뿐이었다.
○.. No. 47 “부활”
먹튀와 미미. 봉중근을 따라다니는 불명예스러운 수식어는 그의 투쟁심에 불을 붙였다. 모두의 관심에서 완전히 멀어진 2군에서, 봉중근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는 데 힘을 쏟았다. 국내 타자들을 전혀 유인하지 못했던 외곽 체인지업 대신 너클커브를 단련했다. 더 큰 변화는 자신감이었다. 외곽으로 도망 다니는 패턴이 아니라 스트라이크존에서 종으로 떨어지는 변화구를 구사하면서 정면승부가 늘어났다. 물론 그래도 많이 맞았다. 하지만 많이 맞더라도 정면승부를 시작했다는 것은 큰 변화였다.
겨울 훈련을 충실히 마치고 구속을 회복한 봉중근의 2008 시즌은 전년도와 전혀 딴판이었다. 자신감을 가지자 파이터 기질이 살아났다. 체인지업 너클커브 슬라이더를 적절히 섞었지만 역시 주무기는 직구였다. 150km 언저리의 강속구를 복판에 꽂아 넣어도 타자들은 쉽게 공략하지 못했다. 허약한 팀타선의 도움이 없어도 그는 의연했다. 허약한 불펜 사정 때문에 평균 투구수를 상회하는 경기가 잦아졌어도 불평은 없었다. 어느새 그는 경기를 지배할 줄 아는 파이터가 되어 있었고, 47번의 등번호는 비로소 제 주인을 만난 듯했다.
2008 시즌, 봉중근은 평균자책 2.66, WHIP 1.19의 수준급 투수가 되었다. 동료의 빈약한 지원 속에 11승에 그쳤지만, 평균자책과 WHIP은 김광현 류현진과 동급인, 그야말로 에이스였다. 동료의 빈약한 지원이 화가 날 법도 했지만, 그는 불평하는 대신 기도를 했다. 승리에 대한 집착과 근성, 47번의 원 주인이 떠난 뒤 LG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프로다운 모습이었다.
○.. No. 51 “변화”
47번이 이제야 제 주인을 만났다고 LG 팬들이 안도할 즈음, 봉중근은 유니폼의 숫자를 51로 고쳐달았다. “제2의 이상훈”이 아닌, “제1의 봉중근”으로의 변신이다. 그런 봉중근이 자신의 새 등번호를 본격적으로 세상에 공개한 것은 줄무늬 유니폼이 아닌, 적색과 청색의 대표팀 유니폼이었다. 3년 전에도 태극마크를 달고 섰던 WBC라는 무대.
당초 구상대로라면 봉중근의 역할은 불펜이었다. 선발은 김광현과 류현진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느새 봉중근은 대한민국의 에이스가 되었다. 믿었던 김광현마저 철저히 두들긴 일본의 강타선을 상대로 한국의 자존심을 세워준 에이스는 봉중근이다. 칠 테면 쳐보라는 식으로 꽂아 넣는 강속구, 승리를 향한 강한 집념과 근성, 마운드 위에 선 한 명의 투수가 뿜어내는 기(氣)는 어느새 경기를 지배했다. WBC 2연패를 위해 독하게 준비했다는 일본마저 눌러버린 에이스의 기백이다.
봉중근의 활약으로 제압한 일본을 미국 땅에서 다시 만났다. 또 봉중근이 선두에 섰고, 그는 다시 일본을 눌렀다. 조그마한 약점도 놓치지 않는 일본의 분석력도 무용지물이었다. 봉중근은 다시 직구를 꽂아 넣었고, 좌우로 기막히게 걸치며 포수 미트에 꽂히는 직구를 일본 타자들은 제대로 때려내지 못했다. 다시 승리. 그리고 봉중근의 포효. 그렇게 대한민국은 다시 경기를 지배했고, 우리는 4강에 올랐다.
그 일본과 다시 만난 결승전. 아무리 봉중근이라고 해도 일본과 세 번이나 부딪히면 난타 당하지 않겠느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봉중근의 컨디션도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좌우를 걸치는 봉중근의 직구는 모두 구심이 외면했고, 봉중근은 자신의 주무기를 봉쇄당한 상태에서 일본의 강타선을 상대했다. 힘겹게 틀어막은 4이닝. 봉중근이 허용한 점수는 비자책 1점뿐이었다. 주무기가 없어도 어떻게든 잡고 만다는 집념이 가져온 최대한의 선전이었다.
○.. No. 51 “출발”
일본에 우승컵은 내주었지만 한국의 선전은 매우 눈부셨고, 실질적인 에이스로 힘든 십자가를 진 봉중근의 활약은 대단했다. 짧은 백일몽을 깬 지금, 이제부터는 다시 1년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봉중근은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씩씩하게 오를 것이다. 그리고 칠 테면 쳐보라는 듯이 강속구를 던질 것이고, 승리를 향한 집념은 경기를 지배할 것이다.
그의 등에 새겨진 번호가 47번이 아니라 51번이라고 해서 아쉬울 것은 없다. LG 팬들은 47번 대신 51번, 이상훈 대신 봉중근을 가진 것이므로. 추억 위에 새롭게 오버랩되는 또 하나의 드라마가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는 “미미한 선수”가 아닌,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대한민국의 에이스”가 우뚝 서 있다.